면도날
"면도날"은 1차 세계대전 이후를 배경으로, 화자인 서머싯 몸(작중 인물로도 등장)이 미국 중서부의 유복한 브래드리 일가와 그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핵심 인물은 전쟁에서 돌아온 청년 래리 대럴이다. 래리는 약혼녀 이사벨 브래드리와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주변의 기대를 뒤로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겠다며 직업도 결혼도 미룬다.
래리는 파리로 건너가 검소하게 지내며 책을 읽고 사유에 몰두한다. 이사벨은 기다리기보다 현실적 안정을 택해,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 아들인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한다. 사교계에 집착하는 외삼촌 엘리엇 템플턴은 래리의 선택을 못마땅해한다. 시간은 흘러 1929년 대공황이 닥치고, 그레이 집안은 몰락한다. 두 딸을 둔 이사벨과 그레이는 유럽으로 옮겨 친척과 지인들의 도움에 기대 산다.
한편 래리는 유럽 각지를 떠돌다 인도로 여행을 떠나 명상과 수련을 거친다. 그는 간결하고 규칙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자유를 체득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는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는 그레이를 호흡·이완법으로 도와 증상을 완화시키고, 예전 약혼자였던 이사벨과도 재회한다.
이 무렵, 이들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소피 맥도널드가 등장한다. 소피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한날에 잃은 뒤 술과 방탕으로 삶이 무너진 상태다. 래리는 소피를 끌어내기 위해 현실적 도움을 아끼지 않고, 급기야 소피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사벨은 래리에 대한 미련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고, 소피의 회복을 흔드는 말을 던지거나 유혹을 남겨 그녀를 다시 술로 이끈다. 파혼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소피는 급격히 추락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남부의 한 항구 도시에서 소피는 살해된 채 발견된다.
한편 엘리엇은 병약해지면서도 끝까지 체면과 사교적 허영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도 최고급 파티 초청장을 갈망하고, 결국 그 바람을 이뤘다는 만족 속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은 사교계의 화려함과 허망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소피의 비극과 엘리엇의 최후를 지켜본 뒤에도 래리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큰돈을 벌거나 출세할 생각이 없다. 미국으로 돌아가 손으로 일하는 기술직으로 검소하게 살 계획을 밝히고, 스스로 납득한 삶의 방식에 따라 조용히 떠난다. 이사벨과 그레이는 가족으로서의 안정을 회복하려 애쓰며, 화자인 서머싯 몸은 각 인물이 택한 길과 그 결과를 담담히 기록한다. 결국 "면도날"은 전쟁 세대가 맞닥뜨린 가치의 혼란 속에서, 부와 체면, 사랑, 탐구심이라는 서로 다른 선택이 어떤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인물들의 구체적 행보를 통해 촘촘히 보여준다.